2020. 4. 14. 18:52ㆍ카테고리 없음
1. 개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조각가이자 건축가, 화가 그리고 시인. 흔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산치오와 함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 중 한 명으로 불린다.[1] 본명은 Michelangelo Buonarroti.[2] 생몰년월일은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 영어로는 마이클안젤로라고 부른다.[3]
다방면에서 걸작들을 남겼는데, 본업인 조각에서는 다비드 상, 피에타 상이 있으며, 회화에서는 시스티나 소성당에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등을 남겼고, 건축에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계획하였다.
2. 어린시절
1475년 3월 6일에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로도비코 부오나로티"[4] 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부오나로티"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병약해서 그가 6살 때 세상을 떠나 어렸을 때 시골에 있는 유모의 집에 맡겨졌는데, 유모의 남편은 세티냐노의 석수장이였다. 이 사실은, 그가 후에 조각가로서의 재능이 가장 두드러지게 되는 데에 분명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 본인도 후에 자신의 글에서 어렸을 때부터 조각용 끌과 망치를 갖고 노는 게 가장 즐거웠다고 했다.
불행히도 그의 소년 시절은 생각 외로 그렇게 순탄치 못했다. 피렌체에서 공부하던 때에는 마을 행정관인 아버지 로도비코 디 레오나르도 디 부오나로티 시모니는 미켈란젤로를 예술가로 키우는 걸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피렌체에는 상업이 매우 발달하고 있어서 상업거래에 따른 계약서의 공증업무가 많았는데,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바로 그 공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의 젊은 시절에는 유럽의 예술가들도 취급이 딱히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몰락 귀족이라도 귀족이라는 자존심이 있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공부로 할 수 있는 직업을 원했지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에 굉장히 분노했다. 삼촌들 역시 그런 미켈란젤로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었다.
아버지와 삼촌들에게 두들겨 맞고[5] 여러 차례 혼나고도,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예술혼이 불타오르는 걸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와 삼촌들도 결국엔 포기하고 만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허락으로 13세에 당시에는 굉장히 유명했던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들어가지만, 1년 만에 나오게 된다. 이유는 스승의 능력이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한다.[6] 사실 기를란다요의 능력이 떨어졌다기보다 미켈란젤로가 너무 뛰어났던 거다. 또 알다시피 미켈란젤로 본인이 회화보다 조각에 더 흥미를 가졌던 것도 있다.
기를란다요는 예술 역사에서 손에 꼽는 천재를 잠깐이나마 제자로 둔 덕분에 자신의 작품이 미켈란젤로와 철저히 비교당하는 굴욕을 두고있다. 그래도 1년이나마 스승이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의 회화가 기를란다요에게 영향을 받은 게 조금 보인다. 미켈란젤로와 비교당해서 그렇지 기를란다요 역시 세련되고 뛰어난 화가다.
그렇게 기를란다요의 화방을 나오지만 곧 그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문의, 정확히는 당시 메디치 가문의 수장 로렌초 데 메디치의 초빙에 의해 미켈란젤로는 15살에 팔라초 메디치에서 공부하게 된다.
폭군에 독재자라는 시각도 있지만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예술을 사랑했고 젊은 예술가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는 걸로 유명했다. 그는 자기 저택 정원에 '대리석 정원'이라는 걸 갖추어 놓고, 젊은 조각가들이 맘껏 공짜로 대리석에 솜씨를 뽐내도록 해주었다. 현재의 대리석 가격을 감안하더라도, 굉장한 대인배이다. 다만 몇몇 역사가들은 이런 씀씀이 때문에 메디치 가문이 기울었다고 하기도 한다.
여기서 미켈란젤로는 연습작들을 몇 개 만드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판의 얼굴과 큐피드(혹은 에로스)이다. 이 2가지 작품은 모두 유실된 상태이다. 하지만 기록에 남겨진 묘사를 보면 어린 미켈란젤로의 담대함과 미숙하지만 재능있는 실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판의 얼굴조각은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의 눈에 들게 되는 가장 큰 계기인데, 로렌초가 이 작품을 보고 미켈란젤로를 크게 칭찬하면서 '판은 나이가 들어서 이가 성하지 않을 텐데'라고 중얼거리자 미켈란젤로는 기뻐하면서 다시 한 번 끌로 뭔가를 조각했다. 로렌초가 무얼 또 수정하는 거냐고 물어보니까, 바로 판의 이에 충치를 조각해서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흠좀무. 큐피드 작품의 경우, 미켈란젤로가 가장 아끼는 작품 중 하나였다. 작품을 나의 자식, 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 로렌초의 배려로 메디치 가에서 몇 년 동안 지내게 된 소년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및 그의 아들들과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파격적인 우대를 받았다. 로렌초의 아들들을 가르치기 위해 초빙된 당대의 유명인사들과 학자들을 만나 플라톤 철학을 배우고, 그들에게서 수준 높은 토론을 경청했으며, 라틴어·문학에 대해서도 굉장히 수준 높은 소양을 갖추게 된다. 특히 그는 단테의 신곡을 좋아한 것으로 보이는데, 훗날 조각과 회화뿐만이 아니라 (사실 저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도 굉장한 거지만) 건축, 시 등 그의 예술 작품 전반에 걸쳐 자신의 예술작품에 고통과 순교, 그리고 구원의 주제를 늘 나타냈다.
그러나 로렌초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고, 미켈란젤로는 직감적으로 떠나야 할 때임을 알았다.
3.대표작
그리고 24세에 그는 '피에타'로 순식간에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버린다.[7] 지금도 이 작품은 모든 피에타에 관한 조각들 중 최고로 평가받는데, 심지어 미켈란젤로 자신의 다른 피에타들도 이걸 능가하지 못했다. 리즈시절이 너무 이르게 왔나…? 다만 이건 피에타 상으로 한정했을 때 이야기고 이후에도 조각으로 뛰어난 작품을 수도 없이 남겼다.
미켈란젤로가 이 피에타를 만들게 된 것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하나 있다. 메디치 가를 나온 후 2년이 지나 미켈란젤로는 오랜만에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아서 저택을 찾았는데 정원에 있는 잠자는 큐피드 상을 보고 지나가던 조각가가 '땅 속에서 찾은 것처럼 만들었으면 좋았을텐데.'라고 한 말에 아이디어를 얻어 미켈란젤로는 그 상을 똑같이 만들어 땅 속에 묻었다가 파낸 후 그을리게 만들어 마치 발굴된 로마시대 조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밀라네제라는 로마의 골동품상에게 팔았는데 밀라네제가 이를 포도밭에서 발굴된 로마 조각상이라며 고위 성직자인 리아리오 추기경에게 팔면서 문제가 된다. 후일, 위작에 사기당한걸 알게 된 리아리오 추기경은 이 조각상을 만든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며 전령을 시켜 고작 20세 어린 미켈란젤로를 찾아오게 된다. 이 잠자는 큐피드 사건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입성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리아리오 추기경이 미켈란젤로의 첫 후원인이 되면서 성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를 만드는 계기로 이어진다. 참고로 이때 밀라네제가 환불해준 큐피드 상은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로 명성을 얻고 난 뒤 더 비싼값에 팔렸다(...)
이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의 아름다움과 예수의 죽음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실제 크기는 2m 이상으로, 굉장히 크다. 이 성모상은 비례학적으로 볼 때 전혀 맞지가 않는데, 이는 예수의 시신을 안고 있으면서도 조각의 중심이나 표현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미켈란젤로가 일부러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실제의 비례보다 2배 정도 크게 조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2m에 달하는 높이와는 달리 옆면의 두께는 1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옷자락 주름의 입체감 때문에 깊이 있는 공간감이 효과적으로 나타났다.
또한, 다른 피에타 작품들은 마리아가 아기 예수와 눈을 맞추거나, 뺨을 맞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계단의 성모'를 포함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작품에서는 마리아가 아들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마도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읜 것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라고 추즉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이 작품에서 마리아가 아들의 얼굴을 외면하도록 해서 아들을 처참하게 잃은 그 슬픔의 표현을 극대화하는 한편, 장래의 부활을 믿기에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분석해본다.
이 성모상은 재미있는 점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켈란젤로가 이 조각으로 일약 스타가 되고 나서도, 사람들이 이 조각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별로 관심을 안 갖자 열받아서는 밤에 몰래 성당으로 가서 자신의 이름을 조각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옷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레이스 옷깃을 자세히 보면 라틴어로 "MICHAEL. AN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조각되어 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너무나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고 한다. 조각가가 조각에 자신 스스로의 사인을, 그것도 성모 마리아의 옷깃에 조각으로 남기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 다행히도 이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행으로 그친다.
일화에 의하면, 그렇게 피에타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고 밤중에 길을 나섰는데 밤하늘을 보자 너무 아름다웠다고 느꼈단다. 그런데 미켈란젤로가 생각하기를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든 신은 당신의 작품 어디에도 서명을 넣지 않았는데 자신은 고작 조각 하나에 오만하게 서명을 넣은 게 너무 부끄럽게 느껴져서, 그 이후 다시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넣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혹은 자신이 만든 피에타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기대와는 달리 피렌체에 대한 언급 없이 로마 또는 롬바르디아 출신 예술가의 작품일 거라는 평가를 듣자 화가 나서 한밤중에 대성당에 몰래 들어가 출신지와 이름을 새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2가지 일화 중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재밌는 것은 조각상에 새겨진 철자를 보면 처음에는 'ANGLVS'라고 새겼다가 'E'를 빠뜨려서오타 'G' 안쪽에 'E'를 작게 새긴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젊고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8]에게서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나 보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동정녀인 성모 마리아는 속세의 나이에 많은 영향을 받지 않기에, 일부러 젊고 아름답게 조각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예수의 모습은 그저 힘없이 축 늘어진 인간의 모습이다.
*테러에 대한 보호
1972년 5월 21일,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던 호주 국적의 헝가리인 지질학자 토트 라슬로(Toth Laszlo)가 크로우 바로 이 조각의 얼굴을 때려 박살내는 테러를 한다.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던 토트는 "내가 바로 예수다, 우리 어머니는 저렇지 않다"며 테러를 했다. 토트는 범행 후 1년간의 재판 끝에 이탈리아 정신병원에서 2년의 강제수용 치료처분을 받은 후 호주로 추방당했다.
이 사건으로 성모 마리아의 코가 날아가고, 왼팔을 비롯한 몇몇 부위가 박살나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피에타가 박살나서 사방팔방으로 파편이 튀자 구경꾼들이 조각들을 주워가버렸다. 그래서 회수한 부위는 파손된 전체부위의 43%에 불과했고 코는 통째로 회수하지 못했다. 결국 1976년에서야 이탈리아 당국은 결국 피에타를 거의 완벽하게 복원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사건 이후에는 아크릴 방탄판으로 보호하고, 관람에 제한을 두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조각품들은 대개 이렇게 이중삼중 보호를 받으니 이해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