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2020. 4. 14. 18:49카테고리 없음


1. 개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음악가, 공학자, 문학가, 해부학자, 지질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역사가, 지리학자, 도시계획가, 집필가, 기술자, 요리사, 수학자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천재이며, 다방면에서 두루 활약했던 르네상스 시기 인재의 대표적 인물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심지어 키도 매우 크고 외모, 목소리도 매우 빼어났다고 한다.[1] 특히 걸출한 회화 작품들을 남겼으며, 대표작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흔히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라파엘로 산치오 등과 같이 거론되며 비교된다.

2. 이름
그의 이름인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는 빈치 지역 출신의 세르 피에로의 아들 레오나르도라는 뜻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흔히 '다 빈치'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지만 전통적으로는 이름인 레오나르도로 줄여 부른다.

'다 빈치'는 성씨가 아니라 그냥 빈치(Vinci) 출신이라고 해서 붙은 칭호이다. 이탈리아가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성씨가 늦게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와 같은 성씨+이름 개념이 아직 확립되지 않던 당시에는 다른 사람(특히 동명이인)과 구별하기 위한 기호로써 자신의 출신 지역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한 동네에 레오나르도가 세 명 산다면 그 셋을 구별하기 위해 각각 '방앗간 집 레오나르도' 와 '앞골짜기 레오나르도', '빈치 사람 레오나르도' 식으로 불렀다.[2] 이 점에서 보면 현대의 성처럼 '다 빈치 씨'라고 부르기에는 적절치 않지만, 기본적으로 성씨와 비슷한 구실을 한다. 로망스어 이름에서 흔히 발견되는 de 뭐시기와 독일어의 von 뭐시기들이 이런 풍습의 흔적이다. 1563년에 열린 제3차 트리엔트(트렌토)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교회에서 모든 이의 성명을 포함한 본적 기록부를 의무화했다. 그래서 1563년 이후 세대에서는 이탈리아에서도 모든 이들이 성씨를 가지게 되어 일반인도 보통 성씨로 줄여 부르게 되었다. 1563년 이전에는 이탈리아에서 아직 성씨를 쓰지 않는 이들이 많아서 이름으로만 부르는 경우가 보편적이었다. 그 예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름인 갈릴레오로 불렸거나, 레오나르도 피에로 다 빈치가 레오나르도로 불렸던 것을 들 수 있다. 한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Petrarca)나, 조반니 보카치오(Boccaccio)처럼 성씨로 불리는 이들도 있었다.
따라서 서양권에서 그를 언급할 때는 레오나르도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3. 생애
레오나르도 "피에로"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밤 3시경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의 '빈치(Vinci)' 마을에서 태어났다. 레오나르도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부모인 변호사 아버지 안토니오 피에로와 농민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아들이었다. 처음 태어나서는 어머니의 집에 살다 대여섯이 돼서 아버지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레오나르도를 돌봐준 것은 아버지보다는 숙부였고 숙부는 어린 레오나르도에게 자연과 세상을 조금씩 가르쳐주었다.

아버지가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인식한 뒤, 레오나르도는 14살쯤 피렌체로 이사를 가 안토니오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공방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20살이 되어 베로키오의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수로 참여해 꼬마 천사 두명을 맡았는데, 당시에 일반적이던 템페라 기법에 새로 알려지기 시작한 유화를 같이 실험해서 그렸다. 세간에는 베로키오가 그걸 보고 현타가 찾아와 화가를 은퇴했다는 야사가 전해지지만, 그 뒤에도 잘만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이 그림 뒤로 베로키오는 다빈치를 정식으로 화가 길드였던 성 루카 조합에 가입시켜주게 했다.

30살이 된 1482년 다빈치는 밀라노 공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밀라노 공이었던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다빈치를 지원하면서, 다빈치는 여러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암굴의 성모>나 <기마상> 등이 이때 만들어졌고, 그 중 가장 유명한 건 <최후의 만찬>이다.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나면서 1499년에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점령하고 루도비코는 프랑스에 투옥되며 밀라노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다빈치는 잠시 베네치아에서 일을 하다가 1500년 피렌체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1501년 <성 모자와 성 안나> 제단화를 그린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연구 스케치와 관찰을 남겼다. 헬리콥터나 인체비례도 등 잘 알려진 다 빈치의 과학자/기술자적 면모는 이 때의 스케치로 알게 된 것. 1503년에 피렌체 시청에 벽화작업을 의뢰받아 <앙기아리 전투> 작업을 시작했는데, 재밌는 건 옆편 벽에서 라이벌인 미켈란젤로가 <카시나 전투>를 작업하고 있었다는 것. 더 재밌는 건 둘 다 결국 완성 못해버리고 튀었다. 역시 라이벌 또한 1503년에는 그 유명한 모나리자 작업을 시작해 죽을 때까지 그림을 손에 놓지 않는다.

1506년에는 루이 12세의 요청을 받고 다시 밀라노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밀라노를 떠나는 1513년까지 다빈치는 다양한 작업과 연구를 하면서 지냈는데, 제3차 이탈리아 전쟁으로 1512년 교황이 밀라노를 공격하고 프랑스는 물러난다. 그렇게 프랑스가 떠나면서 다빈치는 교황령의 로마로 가서 교황청 작업을 주로 하게 되었지만 완성작 없이 취소되었고,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요청으로 프랑스 루아르 강의 앙부아즈 궁에 기거하게 되고, 여기서 <모나리자>가 완성된다. 1519년 4월 23일 세상을 떠난다.

* 출처 : 나무위키